카지노 칩과 모바일 게임 재화
지출의 고통
돈을 쓰면 속이 쓰릴 때가 있습니다. 평소에 굉장히 사고 싶었던 물건임에도 막상 결제할 순간이 되면 갑자기 속이 쓰렸던 경험,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요?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스탠퍼드대 교수인 브라이언 넛슨(B. Knutson)은 동료들과 함께 실제로 이 현상을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(fMRI)으로 증명해냈습니다(!!!). [1]
연구팀은 먼저 피험자가 선호하는 다양한 상품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. 그리고 피험자의 뇌를 살펴봤더니 ‘쾌락’을 담당하는 부위가 큰 반응을 보였습니다. 그러나 이어 실제 그 제품을 사기 위해 결제를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피험자의 뇌에서는 ‘고통’을 담당하는 부위가 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. 아무리 좋아하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지출을 하게 되는 순간에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.
고통 회피
그러나 다행히도 이 세상에는 지출의 고통을 둔화시키고 더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이 존재합니다. 신용 카드, 선불카드, 모바일 페이, 카지노 칩 그리고 게임 재화가 그렇습니다. 이들의 주된 공통점이라면 한 가지. 돈 역할을 하지만 실제 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. 돈처럼 보이지도 않고, 실제 돈과는 지출의 과정도, 결과도 다르기에 고통이 반감되고 더 많이 지출하게 되는 것이죠.
마케터이자 행동과학 연구자인 리처드 쇼튼은 이 현상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[2]. 쇼튼은 런던의 한 카페 앞에서 기다리며 카페를 나서는 무작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.
1. 음료에 얼마의 돈을 지불하셨나요?
2. 어떤 결제 수단을 사용하셨나요?
3. 영수증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?
그 결과, 현금으로 음료 값을 지출한 사람은 실제 그들이 지불한 금액보다 9% 정도의 돈을 더 많이 낸 걸로 기억했고, 반면에 모바일 페이와 같은 비 접촉식 수단으로 결제한 사람들은 실제 지불한 금액보다 5% 정도의 돈을 덜 냈다고 대답했습니다. 돈 같지 않은 돈의 지출에 대한 지각이 부족해진 탓입니다.
카지노 칩과 게임 재화
카지노 칩이나 모바일 게임의 재화도 이 대안의 일종입니다. 심지어 모바일 게임에서는 유저가 상품을 구매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돈(앱스토어 계정에 연결된 계좌나 카드)을 사용하고, 그 결과로 가상의 재화를 얻게 되죠. 그리고 모바일 게임의 시스템에는 유저가 재화를 더 쉽게 지출하도록 유도하는 몇 가지 의도가 담겨있습니다.
1. 작은 단위의 재화 지출
모바일 게임 시스템 내에서 재화는 크게 크리스털 류[3]의 1차 재화, 코인류의 2차 재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[4]. 유저는 앱 내 구매를 통해 1차 재화를 획득해서 다시 2차 재화를 구매한 뒤 이 2차 재화로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장비를 강화하거나 각종 아이템을 구매합니다. 혹은 1차, 2차 재화로 각종 가챠 콘텐츠를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. [5]
그리고 이 구매 과정에 유저가 더 쉽게 재화를 지출하도록 유도하는 첫 번째 기법이 숨어있습니다. 바로 1차 재화의 기본 단위가 2차 재화보다 작다는 점입니다. 예를 들어 각 재화를 동일한 현금 가치로 환산했을 때 1차 재화인 크리스털 10개가 1,000원의 가치라면, 2차 재화인 코인은 10,000개가 있어야 크리스털 10개(=1,000원)의 가치가 되는 식이죠. 따라서 유저는 각종 게임 콘텐츠에 1차 재화를 지출하면서도 그리 큰 양의 지출이라고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. 특히 2차 재화를 구매할 때나 가챠 콘텐츠를 구매할 때는 상대적으로 큰 가치로 보이는 상품에 의해 지출하는 1차 재화의 양을 더욱 작게 느끼게 됩니다. 마치 카지노에서 딜러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칩 앞에서 손님이 교환한 칩이 푼돈처럼 보이고, 또 쉽게 소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.
2. 게임 플레이 보상과 구매 기억의 풍화 작용
두 번째로, 유저가 인 앱 구매를 했던 시점과 1차 재화를 지출하는 시점이 점차 벌어지면서 현재 지출하는 이 재화가 실제 돈을 내고 구매했었다는 기억이 풍화되어갑니다. 여기에 게임 플레이 미션이나 각종 퀘스트, 이벤트를 통해 획득하는 1, 2차 재화가 인벤토리에 더해질수록 이 기억의 풍화 작용은 점차 강력해집니다. 슬슬 내가 가진 이 재화가 구매를 한 것인지 보상으로 받은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죠.
3. 소비의 하방 경직성
마지막으로 게임 시스템은 플레이 초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이러한 미션과 퀘스트 등의 보상 빈도가 점차 줄어들도록 디자인되어있습니다. 반면에 재화를 사용해야 할 콘텐츠는 점점 늘어나고 필요한 재화의 양도 점점 커집니다. 이때 유저는 이미 재화를 풍족하게 지출하는 습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습관에 비해 줄어든 재화 소득은 자금난을 유발하고, 유저는 다시 1차 재화 구매 과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[6]. 실생활에서 늘어난 소비를 줄이기 어려운 것처럼, 게임 내의 소비도 하방경직성이 존재하는 거죠.
시사점
인간은 스스로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하지만, 사실 대부분의 사고에 비이성이 가득합니다.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[6]. 신용카드, 선불카드, 카지노 칩과 게임 재화는 이러한 비이성의 틈 중 하나를 파고드는 검증되고 정제된 기법입니다.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유저가 결제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죠. 게임 개발사는 이러한 기법을 선한 의도로써 유저가 게임을 더 즐겁게 즐기기 위한 장치로 활용할지, 악한 의도로 활용할지 선택해야 합니다.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? 부디 전자 이기를 바랍니다.
1. 1차 재화의 기본 단위를 2차 재화보다 작게 설정하여 게임 내 재화 지출의 고통을 줄일 것
2. 각종 미션과 퀘스트, 이벤트 등으로 계속 재화를 공급하고 유저의 재화 지출량을 서서히 늘릴 것.
3. 게임 진행 정도에 따라 재화 공급량을 점차 줄이고, 재화 소모처와 소모량을 점차 늘릴 것.
[1] 편의점에 간 멍청한 경제학자, 고석균 저, 책 정원, 2019
[2] 어떻게 팔지 답답할 때 읽는 마케팅 책, 리처드 쇼튼 저, 비즈니스북스, 2019
[3] 실제 보석은 소량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는 물건입니다. 1차 재화의 컨셉이 일반적으로 크리스털, 루비와 같은 보석인 점은 이러한 인식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.
[4] 게임 장르와 게임 내 콘텐츠에 따라 2차 재화가 다양하게 설계된 경우도 있습니다. 혹은 캐주얼 게임의 경우 2차 재화가 없이 1차 재화만 존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.
[5] 1차 재화로 구매할 수 있는 등급 범위의 가챠 콘텐츠를 2차 재화로 구매하려면 보통 아주 열심히 게임을 해야 모을 수 있습니다(..)
[6] 함께 읽어볼 만한 글: http://www.itdaily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94464
[7] 물론 대안도 있습니다. 일명 파밍이라 불리는 반복 미션-재화 획득 노가다입니다(..)
*원문 출처 : https://brunch.co.kr/@jaehyunkim